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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린 시절, ‘슨푸’에 인질로 억류된 ‘다케치요’(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첫사랑을 맺었던 ‘카메히메’. 인연은 이어지지 못하고 세월은 흘러 이오의 미망인이 되어 성을 지키게 된 카메히메에게 절치부심, 역경을 넘어 조상들의 성을 찾고 나아가 미카와의 성주로 세력을 넓혀가던 이에야스는 항복을 권했는데... “처음에는 요시모토 공의 주선으로 출가하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흥하는 자와 망하는 자가 걷게 될 운명의 갈림길. 같은 비라도 봄비와 진눈깨비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중략- 진눈깨비는 궂을수록 좋다. 미카와의 성주님께 항복하여 미지근한 비였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차디찬 비로 일관하겠다. 그래야 미카와 성주의 마음에 더 오래 남게 될 것이라고.”(‘도쿠가와 이에야스’, .. 더보기
파시波市 2 “나는 수옥이 밥데기 노릇 하는 것보다 내 옆에 와 있어주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허둥지둥하던 얼마 전의 학수를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의젓하다. 빈주먹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과 이제 수옥은 완전히 자기 것이라는 안심 때문에 학수는 이렇게 의젓하고 여유있고 당당해지는 것일까. 수옥은, “싫어요.”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학수는 혼자 싱글벙글 웃다가 채신머리없이 부엌에까지 따라 들어온다 그리고는 갈비 불이 붙은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아서, “동도깨비 살림 같다.” 수옥의 어깨를 안으며 학수가 된다. “이런 동도깨비 살림이라도 오래 했음 좋겠다.” 순간 학수의 눈에 불안하고 초조한 그늘이 지나간다. 그 마음이 전해지는지 수옥은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다가 학수의 눈을 본다.. 더보기
파시波市 1 명화는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는다. “지금 몇 시야?” 응주는 시계를 본다. “통금 직전이군!” 응주의 표정도 바싹 모여든다. “나, 여기 있을라구 왔어요.” “여기?” “그렇게 하자고 하시지 않았어요?” 명화의 눈은 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게 말했지.”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가겠어요, 오늘 밤은 여기서 재워 주세요.” “서울댁하고 다투었어?” “아뇨.” “그럼 왜, 갑자기?” “결혼하는 거예요, 하루라도 상관없어요.” “하루라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술기운이 다 달아났는지 응주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명화를 쏘아본다. “뜻은 너무 아득해서 나, 나도 모르겠어요.” 응주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았다가 술병에 술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끌어 당겨 병째 마신다. “그렇기는 해. 너무 뜻이 아득하여 귀찮은.. 더보기
머나먼 쏭바강 잊히지 않는 소설 속의 명장면 9 “황(일천 병장)은 처녀 쪽을 향하고 있는 오른쪽 볼따귀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움직임이 괜시레 부자연스러웠다. 자주 겪어보지 못한 귀찮은, 하나 알 수 없이 달콤한 기분이 되었다. -중략- 처녀가 일어서서 안채로 들어 갔다가 커다란 냄비를 들고 나타났을 땐 그미의 목덜미 뒤로 구슬픈 단조(短調)가 흘러 나왔다. 짓밟힌 민족이 가지는 눈물과 퇴폐의 냄새가 그 노래에 배어 들어 있었다. 그 낭랑하면서도 한숨 섞인 여가수의 목소리는, 햇살이 치렁이는 대나무 발에 엉겨 안타깝게 몸부림쳤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붓고 기름 난로 위에다 얹었다. -중략- 황은 통로 쪽으로 다가가 모퉁이칠이 벗겨진 일제 전축을 들여다 보았다. 뒤에서 여자가 바하의 낡은 원판을 집어 들었다. 상큼한 .. 더보기
토지 8 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8 조 병수, 조 준구와 홍씨의 외아들, 척추장애 비운의 육신과 유리알같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 부모에게도 버림받았던, 야차와도 같던 부모에 대한 부끄러움과 서희에 대한 죄의식으로 점철된 성장기를 지닌 인물, 그가 소목장으로 일가를 이루고 자신을 버린 조 준구의 적막강산과 같은 만년을 지키다가 그 굴레를 벗고 지리산으로 소 지감을 찾아 온 장면. 그는 길상이 완성한 관음탱화 앞에서 자신의 캄캄했던 성장기와 비원을 되새기다가 드디어 미소를 짓게 된다. 토지 20권 (5부 5권) 106-107쪽 몰락했다고 했다. 유복했다던 어린 시절 기억은 단편이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좌절하는 날들이 많았다.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두운 경험들과 누항누옥陋巷陋屋이 주는 부끄러움은 상처였다.. 더보기
토지 7 잊히지 못할 소설속의 명장면 7 풍운의 삶을 거쳐 온 길상이 어린 날 들었던 우관도사의 뜻을 좇아 완성한 관음탱화. 산전수전의 시간을 넘어 온 그가 화가가 된 아들 환국에게 그림을 보이기가 쑥스러워 피한 자리, 환국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조바심을 내며 관음탱화와 마주한다. < 환국은 법당으로 갔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낡은 것들 속에 새로움이 한결 선명한 관음탱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관음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관음상을 응시한다. 오른 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든 수월관음水月觀音, 또는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도 하는데 아름다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초한 선線에 현란한 색채, 가슴까지 늘어진 영락瓔珞이며 화만華鬘은 찬란하고 투명한 베일 속의 .. 더보기
토지 6 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6 < 흰빛 보랏빛의 과꽃을 예쁘게 묶은 꽃다발을 여자는 들고 있었다. 천천히 물가까지 간 그는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강물을 향해 꽃다발을 휙! 던지고 다시 누군가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 -중략- 어느덧 여자는 망부석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없었다. 강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옷자락을 휘날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중략- 여자는 몸을 굽히며 앉았다. 엎드려서 두 손에 물을 걷어 올리며 얼굴을 씻는다. 아마 그는 울었던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얼굴을 씻은 뒤 머리를 묶은 손수건을 풀었다. 소담스런 머리칼이 양어깨 위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얼굴을 닦고 일어선 그는 손수건을 펴서 비쳐보고 두세 번 털더니.. 더보기
토지 5 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5 동학장수 김개주와 윤씨 부인의 아들, 구천이 김환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출생의 한을, 형수를 사랑하고 비명에 그 여인을 보낸 한을, 빼앗긴 나라 그 한을 안고 산천을 떠돌다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었다. 필생의 동지이자 벗, 그리고 사돈인 송관수의 유해가 신경에서 도솔암으로 돌아오고 소지감과 해도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울분을 토하고 나온 강쇠는 놀라웠던 경험, 죽은 김환과의 산중문답을 회상한다. < ...... 만물이란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