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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is every day!

관음죽


 

 86년 어느 봄날, 후배가 소개해 준 그녀를 만났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하얀색 차이나칼라 블라우스에 나풀거리는 연노랑꽃무늬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우윳빛 피부가 첫눈에 들어오고 초롱한 눈망울이 내 마음에 닿았다. 세상물정도 모르고 희망적인 용기로 충천했던 나는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손톱만한 떡잎이 두 장 나 있는 ‘새끼관음죽’ 한 포기를 사서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생각하면서 나는 예의 나만의 꿈-남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을 꾸게 되었다. 화분의 관음죽을 잘 키워 먼 훗날 그녀가 낳아 준 우리의 자식들에게 사연을 일러주고 한 포기씩 나누어 주리라고.


 문제의 관음죽이 어느덧 내 키를 훌쩍 넘겼다. 아버지랍시고, 또는 바쁜 업무를 들먹이며 지난 수 년간 두 딸에게 화분에 물을 주도록 시키고 살았다. 물론 나름 감동적인 사연도 넌지시 일러주며. 두 딸의 반응이 의외였다. 별 느낌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말마다 자매가 니미락내미락 서로 귀찮아하기만 할 뿐.


 회사일을 핑계대고 방치한 동안 -비단 화분만이 아니라 가정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만- 두 딸의 눈칫물 받아먹고 자라던 관음죽은 시들시들 생기를 잃어버렸다.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외면 아닌 외면이었던 셈이다.


 이른 봄, 용기를 냈다. 아침 일찍 화훼단지에 가서 큰 화분도 사고 비료도 구하고... 두 딸에게 나누어 줄 요량으로 딱 7년, 분갈이조차 해 주지 못했던 화분을 엎었다. 덕분에 난들도 묵은 분에서 해방되었다.


 딸들에게 미루지 않고 이제 다시 키워야지 한다.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반 너머 살아버린 삶. 나머지 삶에서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알면서 행하지 못했던 아둔함과 나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니, 참 시원하고 또 행복하다.

 

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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