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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토지 8

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8

 

조 병수, 조 준구와 홍씨의 외아들, 척추장애 비운의 육신과 유리알같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 부모에게도 버림받았던, 야차와도 같던 부모에 대한 부끄러움과 서희에 대한 죄의식으로 점철된 성장기를 지닌 인물, 그가 소목장으로 일가를 이루고 자신을 버린 조 준구의 적막강산과 같은 만년을 지키다가 그 굴레를 벗고 지리산으로 소 지감을 찾아 온 장면. 그는 길상이 완성한 관음탱화 앞에서 자신의 캄캄했던 성장기와 비원을 되새기다가 드디어 미소를 짓게 된다.

 

<빛이라고는 한 줄기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과도 같았던 그 시절, 사방은 나갈 곳 없는 절벽, 병수는 한숨을 내쉰다. 시궁창과도 같았던 욕망과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악행의 화신 같았던 부모, 그 핏줄, 그것에 맞먹는 추악한 자기 자신의 모습,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었으며 자신은 그것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육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영혼을 영원히 잠들게 하지 않고서는 그 운명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죽으려고 몇 번인가 강물에 몸을 던졌던 일도 생각이 났다. 주막집 영산댁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양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 그것은 참된 것과 아름다움에 대한 그것이었다. 소망하는 것만으로 병수는 간신히 자신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것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살아남았으리

지난 날의 풍경을 화첩같이, 화첩 한 장 한 장을 넘기듯 병수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저주스럽지가 않았다.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불행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삶의 값어치를 그런대로 하고 살았다는 슬픔만 있었다. 병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관음탱화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상형, 고맙소.’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다가와서 병수의 손을 굳게 잡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길상의 손이었고 관음탱화는 길상의 그 영혼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의 소망의 세계였다.>

                                                                                                            토지 20(55) 106-107

 

 몰락했다고 했다. 유복했다던 어린 시절 기억은 단편이었고 중, 고등학교 때는 좌절하는 날들이 많았다.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두운 경험들과 누항누옥陋巷陋屋이 주는 부끄러움은 상처였다. 자존감을 지니기 어려웠던 시기, 구한말 집안의 노비들을 면천시키고 상업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던, 형평운동에 앞장서고 광복에 대한 열망에 투신했다던 직계 선조들의 전설과 기독교 신앙은 버팀목이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온 30여년의 날들.

대상이 달라졌으나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었고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세월들을 살아 왔다. 그러나 이제는 저주스럽지도, 원망스럽지도 않불행했다는 생각도역시 없다. ‘삶의 값어치를 그런대로 하고 살지는 못했으나 값어치가 전혀 없는 삶도 아니었다. 남은 삶도 부디 추하지 않기를...

소설을 읽다 책을 덮고 오늘 아침 지난 삶의 풍경들을, 사건과 인연들을 찬찬히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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