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좇고 다가올 삶에 대해 용감하게도 꿈을 품었던 시절, 은사들의 연구실에서 곁눈질로 흠모하던 한국난들을 무모하게도 키워보리라 작정했었다. “뭐 돌보고 가꾼다 말이고. 난초 지도 생물인데 지가 살려고 노력해야지, 안 그라믄 마 죽는기고.”하시던 선생님의 말뜻도 헤아리지 못하고 물도 아껴서 조금 주고 방치하는 것이 자랑인양 민춘란 50여 분을 연립주택 서향 베란다에 놓았었다. 이십대 후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대부분 고사하였고 한두 분만 질긴 생명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고서도 그 화분만은 버리지 못해 가끔씩 돌보면서 너댓 분으로 분주해놓고 건성으로 지내면서 언감생심 다시는 난초를 키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사실, “寫蘭亦當 自不欺心始, 난초를 그린다면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한다.”던 추사선생의 말처럼 난초를 기르는 일 또한 뜻을 키우고 가다듬는 일이어야 하는 것인데 세사를 탓 삼아 부박浮薄하게 살아가는 시정잡배의 처지와 뜻으로 난을 가꾼다는 것이 스스로 가소로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세리稅吏 마태도 전정을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좇다가 열두 제자의 필두筆頭가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악지를 부리며 다시 난을 키우기로 작정하고 몇 달째 구해 모아 놓고서는 오늘도 아침 저녁으로 경박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자기의 마음은 고사하고 남이라도 안 속이고 살아야 할텐데.
2010.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