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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Paradise

달나라에 사는 여인 1. 환상 가브리엘의 환상은 뱃노래와 같은 것. 망망한 대양이 아니라 푸른 녹음을 스치는, 잔잔한 여울의 강물 위에 떠가는 배에서 흘러 나오는 여리고 투명한 口音같은 것. ‘Tchaikovsky: Les Saisons (The Seasons), Op. 37b - VI. June: Barcarolle’ ‘From the land of the moon’ 욕망은 추스르지도 못할 만큼 강렬하지만 그 만큼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는 것. 가브리엘이 사랑한 군인 앙드레의 마지막 대사 ‘지금 우리에겐 불가능해요.’ 정열은 언제나 순간에 사는 것.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 버리면 어느새 어쩌면 물결처럼 흘러가는 것. 가브리엘이 선생님에게 거절 당한 뒤 치마를 들추고 치모로 물살을 느끼는 장면은 감독이 고민한 상징으로 읽.. 더보기
라스트 미션 Clint Eastwwod 그의 나이는 올해 90세, 젊은 시절의 영화는 두어 편, 그러나 기억에 희미하고 인상 깊었던 영화는 ‘그랜 토리노’(2009년). 누구에게나 젊은 날은 말 그대로 그랜 토리노, 젊은 날 盛世가 기울 무렵 보았던 탓일까? 그의 연기가 로망처럼 뇌리에 남았다. 그는 많이 늙었다. ‘얼’의 회한처럼 오랜 시간 ‘일’ 때문이라고 가정에 소홀했던 나도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의 세월을 浮沈하며 떠 돌았다. 관계를 복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딸들에게 애비란 어떤 존재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위안이라면 30년의 세월이 더 남은 것이니 다시 정신을 모으고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지나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던 ‘얼’의 충고는 오늘 나에게 주는 것. 훗날 나의 ‘.. 더보기
레볼루션너리 로드 혁명은 ‘파리’에도 ‘레볼루션너리 로드’에도 없다. 급격한 변화, 멀리는 르네상스와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가까이는 동학혁명과 4.19혁명이 보여 주듯 이론대로 혁명은 해방과 자유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에게 혁명은 마지 못한 것. 자신이 절실하게 원한 것도 아닌 억지 춘향의 희망. 그는 아무리 봐도 나와 비슷한 류의 흔해 빠진 속물이다. 심지어 에이프릴에게는... 왜 그녀는 그토록 ‘파리’를 소망했었나, 연극배우로서 인정받지 못한 자괴감이, 50년대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던 시절, 가정 주부의 나른한 안락함이 이유였을까? 프랭크는 특별한 사람이라던, 그래서 파리로 가 자신이 희생할 테니 프랭크에게는 살고 싶은 삶을 살아보라던, ‘파리’를 꿈꾼 에이프릴의 순정적 사랑은 진실했었나. 이웃집 남자와.. 더보기
버닝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벤은 진지함을 버리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냉혈한이었을까, ‘태워주기를 기다린’다고 짐짓 단정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대상을 태우면서 가슴에 베이스를 느끼는 자라면. 그러고도 대상은 ‘사라졌어요, 연기처럼’이라고 읊조리는 벤은 적어도 내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내가 아는 한에는 벤처럼 쿨하게 삶을 즐기기만 하는 삶은 이제껏 없었으니. 벤이 보여주는 라이프 스타일은 흔히 현대인이 꿈꾸는 환각 같은 것일지도. 벤 역시 또 다른 비닐하우스(연주였던가?) 태우기 위해서는 욕실에서 콘택트렌즈를 껴야 하지 않았던가. 해미가 태.. 더보기
20th century women 나는 누구인가? 내 가치관은 무엇인가? 일찍이 연암은 열하일기 중 ‘일야구도하기’에서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 것인가?”라고 일갈하였지만 그러한 깨달음은 연암의 경지일 뿐, 우리와 같은 범부의 인생에서 마주치는 외물과 사건들, 보고 듣는 것은 필경 누가 된다는 깨우침은커녕 우리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조화를 일으켜 우리를 포로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 스스로 그 견문이 어느 순간 내면화되어 자신마저도 속고 사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20세기의 여인들 20th century women’ 설.. 더보기
최악의 하루 "그 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거예요. 진짜라는게 뭘까?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는 진실인가? 진실해야만 진짜라는 것인가?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거짓은 가짜라는 것인데 나는 천상 가짜를 벗어날 수 없겠군. '진실은 죽어가 는 사람의 입술 위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그 진실은 누구를 위한 것? 끝내 진짜가 되지 못한 가짜의 필생의 회한 같은 것. "연극이란게 할 때는 진짜예요, 끝내면 가짜고..." 명배우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씀. 할 때마저도 진짜가 되지 못하는, 그래서 늘 겉돌고 마는, 어색한 삼류다.. 더보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눈물 속에 '춘수'로 특별할 것도 없는 한 남자가 말했다. "사랑합니다.", "결혼 할 순 없지만 결혼하고 싶어요.", "이 느낌 평생 간직할께요.", "음 술 진짜 맛있네요." '희정'이라고 특정할 것도 없는 한 여자가 말했다. "참 솔직하셔서 좋으시겠어요.", "이런 걸 주우셨어요?", "이게 우리의 결혼반지예요." 내가 꼽는 이 영화의 백미! 두 편으로 나누어진 이야기 중, 두번째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언제 쯤 나도 저런 적이 있었을까? 없어서 참 심심한 삶이었던, 그 알량한 용기가 없어 이런 찌질한 모양새마저 한 번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나에게는 회한이거나 적어도 돌아갈 수 없는 날들에 대한 때 늦은 추억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 그 순간만은 다른 것들을 제쳐 놓을 수 있다는 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