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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Paradise

우묵배미의 사랑



우묵배미의 사랑 (1990)

감독 : 장선우 주연 : 박중훈, 최명길, 유혜리

1. 우묵배미

‘배미’는 ‘구획진 논을 세는 단위’이니 우묵하게 들어간 논, 또는 마을이란 뜻의 지명일게다.(실제로는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의 옛이름이라 한다) 고도성장 개발의 그늘,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변두리 인생이 찾아든 곳, 카세트 레코더로 가요를 틀어 놓고 죽으라고 미싱을 돌리는 낮과 단칸방 문턱에 앉아 발을 씻고 변변치 않은 찬에 밥을 떠 넣어야 하는 밤이 이어지는 곳, 세련되고 폼나게 살고 싶으나 현실은 지지리도 궁상맞은 일상의 공간. 7,80년대 한국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모습으로 기억의 한 구석에 실재하는, 돌아보면 뜬금없이 눈물짓게 하고 그러면서도 어이없이 그리운 공간이기도 하다.

2.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공례’(최명길 분)는 ‘일도’(박중훈 분)에게 ‘샛길의 사랑’이라 말한다. 남이 보기에도 떳떳한 한길의 사랑이 있다면 부끄러워서 숨겨야 할 사랑은 샛길의 사랑이겠다.

가출해야만 했던 산골 소녀의 순정을 지독한 억척으로 바꾸어 일도를 볶아 대는 방석집 ‘갈보’ 출신의 아내와 막일을 전전하며 며칠씩 집을 비우다가도 무슨 이유인지 공례를 지독하게도 후려 패는 남편, 한길의 사랑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치마 공장’에서 만나게 된 일도와 공례는 서로에게 미칠 듯이 빠져 들어간다. 윌리엄 홀덴과 제니퍼 존즈의 우아하고 폼나는 사랑만 사랑일까? 여인숙에서 여관으로 비닐하우스로 그 무대를 옮겨가는, 보는 이를 웃게도, 울게도 만드는 두 사람의 사랑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숨어 살던 집까지 찾아낸 아내에게 일도가 끌려간 뒤 행여나 하는 기대로 수없이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울음을 삼켜야 했던, 자식 마저 버린 공례의 순정을 복잡하고 머리 아픈 건 질색이라는 일도의 경박함이 짐작이나 했을까, 비닐하우스를 뛰쳐나와 절규하며 달아나던 공례의 뒷모습으로 사랑은 아프게도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이다.

3. 아 유영길!

유영길 촬영감독의 화면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초록물고기>(1997)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창고 씬, 명멸하는 성냥 불빛에 찰나로 보이는 문성근의 표정 연기와 차창에서 일그러지던 한석규의 단말마 숨결을 보고 촬영감독 때문에 영화를 다시 찾아보기 시작했다. <창 밖에 잠수교가 보인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6), 〈칠수와 만수〉(1987), 〈개그맨〉(1988), 〈남부군〉(1989),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하얀 전쟁〉(1991).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를 거쳐 유작이 된 〈8월의 크리스마스〉(1998)까지.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도 전혀 세트를 쓰지 않고 인공 조명의 흔적을 되도록 남기지 않으면서 리얼리즘 미학의 대가답게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들을 촬영해 냈다. 보는 내내 몇 번을 정지 화면으로 다시 들여다 보았다. 사진 작가의 작품이 무색할 만치 아름다운 스틸 컷들. 강렬하게 유영길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의 이른 죽음을 애도한다. 아 유영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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