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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토지 6

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6

 

< 흰빛 보랏빛의 과꽃을 예쁘게 묶은 꽃다발을 여자는 들고 있었다. 천천히 물가까지 간 그는 무슨 말인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강물을 향해 꽃다발을 휙! 던지고 다시 누군가를 애절하게 부르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 -중략- 어느덧 여자는 망부석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없었다. 강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옷자락을 휘날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중략-
여자는 몸을 굽히며 앉았다. 엎드려서 두 손에 물을 걷어 올리며 얼굴을 씻는다. 아마 그는 울었던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얼굴을 씻은 뒤 머리를 묶은 손수건을 풀었다. 소담스런 머리칼이 양어깨 위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얼굴을 닦고 일어선 그는 손수건을 펴서 비쳐보고 두세 번 털더니 다시 접어서 흩어진 머리를 모아 묶는다.>

 

                                                                    토지 16권(5부 1권) 209쪽

 

 통곡도 부족했을 듯, 길상과 서희의 딸로 자라난 봉순의 딸 이 양현! 서희를 사랑했으나 오누이가 되자는 서희의 선언에 영영 서희의 곁을 떠나 술과 방랑으로 세월을 보낸 이 상현, 길상을 사랑했으나 서희와 길상이 간도로 떠나던 날, 서희의 안전을 위해 대역을 하고 절로 숨어버렸던 봉순, 훗날 기화라는 기명으로 기생이 된 봉순이 실의에 젖어 자신을 찾은 상현과 낳은 딸. 딸의 존재도 모른 채 만주로 떠난 버린 상현과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린 딸을 남긴 채 섬진강에 삶을 던진 봉순. 서희의 친딸과 같은 보살핌 속에 한 송이 꽃처럼 자랐다한들 양현의 가슴 속에 어찌 절절한 한이 없을 수 있으리.
 무슨 말을 속삭이고 누구를 애절하게 불렀던 것일지. 일도 사랑도 우리의 뜻대로이기를 기대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지나가 버린 인연, 이루지 못한 일에 연연해하고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이 겨울, 가장 춥다는 아침에 어제 읽은 이 구절을 놓고 다시 읽고 있노라니 가슴 속조차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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