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2
박 경리라는 작가는 그 시절에 어떤 견문과 지식의 업을 쌓았는지 ‘토지‘를 읽어 가다 동학에 관한 얘기며 하얼빈, 연해주, 용정에 걸친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를 접하면서 아득한 감탄을 숨길 수 없다. 그러다 소설 속 인물들의 얘기로 돌아오면 실감이 나다 못해 실없이 웃게도 하고, 함께 분노하게도 하고 어떨 땐 혼자 눈물까지 닦고 나서는 도대체 이 무슨 조화속인지 싶게 만든다.
파란만장한 ‘이 용’의 삶, 그리고 무당 딸 ‘월선’과의 사랑. 설운 사랑이야 도처에 왜 없을까마는 이 두 사람의 사연을 그리는 장면마다 처연한 마음이 일고 월선의 운명 장면, 극도로 절제한 간결체의 문장 앞에 급기야 뜨거운 가슴이 울컥하고 만다.
<방문은 열렸고 그리고 닫혀졌다. 방으로 들어 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앉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토지’ 8(2부 4권) P243-244
혼자서 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용의 가슴에 정말 한이 남지 않았을까? 구구한 사연과 회한에도 불구하고 순정을 다해 사랑했다면 마지막 순간에 뒤돌아보아도 마음에 한 점, 한조차 남지 않는다는 것인가. 삶에도 사랑에도 어설픈, 속된 범부의 깜냥으론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참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