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5
동학장수 김개주와 윤씨 부인의 아들, 구천이 김환은 소설의 중반부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출생의 한을, 형수를 사랑하고 비명에 그 여인을 보낸 한을, 빼앗긴 나라 그 한을 안고 산천을 떠돌다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었다. 필생의 동지이자 벗, 그리고 사돈인 송관수의 유해가 신경에서 도솔암으로 돌아오고 소지감과 해도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울분을 토하고 나온 강쇠는 놀라웠던 경험, 죽은 김환과의 산중문답을 회상한다.
< ...... 만물이란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란 말도 못들어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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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 눈물 없는 무리들이 언제나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그 만남의 일순이 영원일까. 강쇠야 그것은 나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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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생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도는 영혼, 그게 한이지 뭐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토지 16(5부 1권) 197-198쪽
가속의 생계나 떠메고 헉헉댈 뿐,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이제까지 오롯한 뜻 하나 가슴에 남았던가, 그마저 아득하여 헛헛한 삶의 길에 외로움을, 한을 입에 올릴 염치나 있을까마는 입버릇처럼 되뇌던 독백이 ‘기쁨은 잠시 쉬어가는 고개,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란 표현을 만나고, 자신의 짐 벗으려 말고 온전히 감당한다면 나 또한 ‘유리알처럼 맑아지는’ 날이 있을는지꿈꾸다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이 응어리’, ‘생사가 모두 한’이라는 글을 읽으며 뜬금없는 위안을 받는다. 덜 떨어진 범부의 흉리에 한은 무슨 한... 아직 갈 길은 멀고 해도 저만치 야무지게 남았는데 꿋꿋하게 가야지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