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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파시波市 1

명화는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는다.

지금 몇 시야?”

응주는 시계를 본다.

통금 직전이군!”

응주의 표정도 바싹 모여든다.

, 여기 있을라구 왔어요.”

여기?”

그렇게 하자고 하시지 않았어요?”

명화의 눈은 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게 말했지.”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가겠어요, 오늘 밤은 여기서 재워 주세요.”

서울댁하고 다투었어?”

아뇨.”

그럼 왜, 갑자기?”

결혼하는 거예요, 하루라도 상관없어요.”

하루라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술기운이 다 달아났는지 응주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명화를 쏘아본다.

뜻은 너무 아득해서 나, 나도 모르겠어요.”

응주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았다가 술병에 술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끌어 당겨 병째 마신다.

그렇기는 해. 너무 뜻이 아득하여 귀찮은 세상이다. 이렇게 살면 되는거지. 학수처럼 되기까지가 문제다.”

술을 한 모금 또 마시고 나서 응주는,

명화는 화를 내지 않는군. 내 하숙으로 오라 오라 했지만 나는 명화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 명화? 그래도 화가 나지 않어?”

화를 낼 시기는 이미 가버렸어요.”

명화는 나무둥치처럼 앉아서 대꾸한다. 무방비 상태의 명화 앞에 응주는 점점 더 불안을 느끼는지, 그래서 그 불안을 무마하려고 막연한 자의식을 보다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모양이다.

오늘 밤은 감추지 말고...... 그래요, 정직하게 저를 대해 주세요.”

여전히 나무둥치처럼 앉아서 명화는 뇐다.

조정할 수 없었던 감정에 허덕이며 마음과는 거리가 있는 말을 지꺼리고 있던 응주는 술이 핏속으로 퍼져 감으로써 모든 것을 두들겨 부수고 싶은 난폭한 충동을 느끼는지 표정이 동물적으로 변하여진다. 그런 얼굴로 명화를 노려보고 있다가 후닥닥 일어서서 등불을 끈다.

그는 덮쳐 씌우듯 하며 으스러지게 명화를 끌어 안는다. 서로가 처음, 처음 경험하는 어둠에서,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싶다는 갈망이 그들 사이의 저항을 쫓아내고 만 듯했다.

마지막 밤, 영원히 떠난다는 명화의 슬픔과 이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곳에서 빚어진 불안과 방황이었다고 깨달은 응주의 기쁨이 이상한 화합을 이루고, 그들은 그 행위 속에 전신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파시波市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3 P538- 539

 

미쳐서 자살한 모친, 그 혈연의 족쇄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의 거듭되는 구혼도 망설였지만 어느 날 그 결혼을 반대해 온 남자의 아버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게 된 조명화의 황당함과 혈통을 문제 삼고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전쟁을 피하고 미국행이 보장되는 윤죽희와의 혼사, 사랑도 정의감도 이기심마저도 명확하지 못한 박응주.

명화는 일본으로의 밀항을 결심하고 작심한 듯 통금 직전의 시간에 응주의 하숙을 찾아 간다.

슬픔과 기쁨이 부딪히는 하루의 결혼

명화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장벽과 혼돈의 사슬을 끊고 주체적인 삶을 향하여 출발하는 사랑이 의식이었다면 응주에게는 흐리멍텅했던 불안과 방황을 깨우쳐 주는 아픈 각성의 순간이 되었을까?

 

決然하지도 못했던, 하물며 방황조차 제대로 못하고 눈 앞의 삶만 보고 지나온 날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어둑한 한 줄기 길. ‘하루의 결혼같은 결단은 꿈꿀 수도 없지만 적어도 뒤늦은 각성으로 허망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눈이라도 떠 보자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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