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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머나먼 쏭바강

잊히지 않는 소설 속의 명장면 9

“황(일천 병장)은 처녀 쪽을 향하고 있는 오른쪽 볼따귀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움직임이 괜시레 부자연스러웠다. 자주 겪어보지 못한 귀찮은, 하나 알 수 없이 달콤한 기분이 되었다. -중략-

처녀가 일어서서 안채로 들어 갔다가 커다란 냄비를 들고 나타났을 땐 그미의 목덜미 뒤로 구슬픈 단조(短調)가 흘러 나왔다. 짓밟힌 민족이 가지는 눈물과 퇴폐의 냄새가 그 노래에 배어 들어 있었다. 그 낭랑하면서도 한숨 섞인 여가수의 목소리는, 햇살이 치렁이는 대나무 발에 엉겨 안타깝게 몸부림쳤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붓고 기름 난로 위에다 얹었다. -중략-

황은 통로 쪽으로 다가가 모퉁이칠이 벗겨진 일제 <파나소닉> 전축을 들여다 보았다. 뒤에서 여자가 바하의 낡은 원판을 집어 들었다. 상큼한 향내가 끼쳤고, 여자의 손이 자신의 팔뚝을 스쳤다고 황은 생각했다. 황이 뒤돌아 보았다. 여자는 눈을 비키지 않았다.”

1979년 부산 동래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는, 겉멋 든 문학 소년이 읽었던 소설, <머나먼 쏭바강>. 군 생활이란 어떤 것인지 또 전쟁은 과연 무엇인지 월남이란 나라는 ‘인문지리’ 시간에나 들었던 17살의 나에게 어떤 장면이나 문구가 그리 감명적이었을까?

기껏해야 개인의 의지와 괴리된 국가의 논리. 자원 파월이라지만 다른 돌파구가 없었을 앞 선 세대의 절망감에 대한 막연한 공감, 열대 밀림과 스콜이란 이국의 풍토에서 목숨을 내건 전투담과 전쟁 소설의 단골 메뉴인 가슴 찡한 로맨스에 ‘응웬 빅 뚜이’란 이방 소녀에 대한 설렘.

훗날 이런 저런 곡절로 결혼하고 90일 만에 27살의 나이에 신병 훈련소로 끌려간 뒤 겪은 군 생활 틈틈이 ‘머나먼 쏭바강’의 몇 장면들이 떠 올랐다. 나름 파란波瀾 많았던 내 이십대의 서곡이었는지 고등학교 일학년 스포츠머리의 소년은 예감이나 했었을까?

<머나먼 쏭바강> 박영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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