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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못할 소설 속의 명장면

파시波市 2

나는 수옥이 밥데기 노릇 하는 것보다 내 옆에 와 있어주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허둥지둥하던 얼마 전의 학수를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의젓하다. 빈주먹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과 이제 수옥은 완전히 자기 것이라는 안심 때문에 학수는 이렇게 의젓하고 여유있고 당당해지는 것일까.

수옥은,

싫어요.”

하며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학수는 혼자 싱글벙글 웃다가 채신머리없이 부엌에까지 따라 들어온다 그리고는 갈비 불이 붙은 아궁이 앞에 나란히 앉아서,

동도깨비 살림 같다.”

수옥의 어깨를 안으며 학수가 된다.

이런 동도깨비 살림이라도 오래 했음 좋겠다.”

순간 학수의 눈에 불안하고 초조한 그늘이 지나간다. 그 마음이 전해지는지 수옥은 부지깽이로 불을 헤집다가 학수의 눈을 본다. 학수의 눈에 비치는 불그림자, 빛이 타닥타닥 튀면서 아픔과 장래에 닥쳐올 어떤 형태를 두려워하는 붉은 광채.

왜 보지?”

학수는 말하면서 수옥을 끌어당겨 안는다. 그의 눈빛이 강해질수록 그는 더욱 힘을 주어 수옥을 안는다

행복하나?”

수옥은 학수의 넓은 품, 비리치근한 생선 냄새가 풍기는 학수 품에 얼굴을 파 묻은 채 고개를 끄덕여준다. 수옥의 몸에서는 구수한 삶은 멸치냄새가 풍긴다.

나도 기분이 좋아. 천지가 무너져도 좋겠어.”

불이 아궁이 밖으로 번져 나온다. 갈비 속에 섞여 있던 도토리나무의 큼지막한 가랑잎에 불이 댕겨 불꽃이 커진다. 수옥은 놀라며 얼른 부지깽이를 들고 불을 밀어 넣는다.

이대로 타죽으면 어떨까봐 그러노.”

 

파시波市박경리 마로니에북스 2013 P441-442

 

이북에서 내려 온, 거제도를 거쳐 부산까지 흘렀다가 서울댁의 제부에게 몹쓸짓을 당하고 사람좋은 조만섭의 손에 끌려 통영으로 오게 된 수옥은 다시 한 번 서울댁 욕심의 희생양이 되어 노랭이 밀수꾼 서영래에게 유린당한 신세.

몰락한 집안의 학수는 수옥에게 끌리고 두 사람은 급기야 개섬으로 도망가서 처음으로 행복의 절정을 맛본다. 결국 서영래의 계략으로 학수는 군에 끌려 가고 수옥은 妊婦의 몸으로 학수의 본가에 가야하는 이별을 맞게 되지만...

 

찰나의 희열, 이어지는 긴 기다림과 인고의 시간은 인생사 불변의 섭리!

 

불꽃같은 순간의 추억이 고통스런 삶을 견디게도 하고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지만 명멸하는 불꽃의 빛을 누구인들 뇌리에서 지울 수는 없는 일.

 

그 순간들이... 있었다,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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