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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poésie

<환상을 쫓는 여인An Imaginative Woman>

<환상을 쫓는 여인> 을 읽고

Thomas Hardy
장 경렬 옮김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살림 1996)

일상적 행복은 無味한 것인가?

총기제조업자인 월리엄 마치밀과 엘라 마치밀부인은 적어도 잘 어울리는 부부다. 서술자의 언급처럼 나이도, 용모도, 집안 형편도 그렇다. 사소한 문제라고 하는 성격도 마찬가지다. 정신적으로 언제나 사업에 몰두하는 남편을 아내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생각하든, 詩神을 숭배하는 아내의 우아한 취미를 남편이 유치하다고 여기든 그만큼 다들 다소의 차이 정도는 안고 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런 차이가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끌리게 하고 그 만큼 그 부부의 삶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남편을 향한 아내의 혐오와 폄하는 현실감각이 부족해 보이는 그녀의 철저히 주관적인 인상, 나아가 감정의 사치는 아니었던가. 자신의 섬세하고 우아한 감정의 현실적 지지기반이 우둔하고 고상하지 못한 남편의 직업인 것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딱딱한 말투이긴 하지만 언제나 아내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남편, 작고 우아하면서 날씬하고, 경쾌하고, 생기가 넘치는, 섬세한 감정의 아내, 그리고 한 달 쯤 해변의 휴양도시 쏠런트에서 집을 구해 휴가를 보낼만한 경제력과 여유, 이런 행복은 정말 무미한 것인가? 이를 행복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기어코 속물인가. 행복은 이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과는 또 다른 영롱하게 아롱지는 정신의 불빛들인가.

열정의 그림자, 집요한 중독과 마취 증상

남들은 ‘뉴 퍼레이드 13번지’라고 부르지만 집주인만 코버어그 저택이란 이름을 고집하는 허영기 묻어나는 집에 한 달간 기거하게 된 마치밀부부와 세 아이. 그녀는 우연하게도 ‘로버트 트리위’라는 시인이 기거하던 방을 발견하고 그 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트리위에 대한 환상을 키우게 된다. 엘라 마치밀 부인이 남자로 행세하던 필명 ‘존 아이비’의 시와 트리위의 시가 한 잡지에 나란히 실렸다는 우연 - 기실 그 우연도 두 사람 모두 신문에 난 비극적 사건을 보고 동시에 시를 지었던 사소한 우연 - 때문에 시작된 환상은 트리위의 시에 대한 관심에서 시기심으로, 다시 열등감으로 이어지면서 그 정도가 증폭된다. 이제 그녀는 트리위의 시집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고 그의 시를 능가하는 시를 써 보려고 애쓰다 실패하고는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이 되고 만다. 모든 열정이 그러하듯 맹목적인 집착은 트리위의 외투를 ‘엘리야의 외투’로 착각하게끔 하고 “나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영광스러운 천재인 그와 한 번 겨룰 수 있게 하소서.”라고 눈물에 젖어 외치게 한다.
그 뿐이던가. 호기심이라는 열정은 그녀의 관심을 이제 그의 형상과 실재에까지 집착하도록 만들고 만다.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그녀, 그리고 책상 앞에 의자를 놓고 걸터 앉아서 트리위의 달콤한 시 몇 편을 낭송하고는 사진을 꺼내보는 그녀. “지금까지 그토록 잔인하게 몇 번이나 저의 빛을 가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군요.”라며 눈물고인 얼굴로 사진에 입술을 대고 그러다가 갑작스레 웃어대곤 눈물을 닦는다니 그녀 자신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어쩌면 지극히 희화적인 장면이 아닌가.


환상의 종착역, 죽음과 남겨진 비극

마치밀 부인이 그토록 흠모했던 트리위 역시 환상을 쫓는 인물이었다. 그가 유서에 남긴 것 처럼 그가 동경했던 ‘찾을 수 없는 여인’. ‘발견할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여인이 그의 시에 영감이 되었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만날 수도, 얻을 수도 없었던 것. 그러다 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환상의 희생자 트리위. 그러한 트리위에 집착했던 또 한 사람의 희생자 엘라 마치밀.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난 그녀 역시 네 번째의 해산을 앞두고 슬프고 무력한 기분에 휩싸이다 해산한 뒤 시름시름 삶을 마감하고 만다.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당신. 남편인 당신을 그렇게 잊어 버릴 수 있었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저는 병적인 상태였고, 당신은 친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제 지식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고 반면 그 사람은 저와 같은 수준이거나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또 다른 애인을 필요로 했다기 보다는 좀 더 저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었나봐요.” 그녀가 남긴 절명의 언사. 환상이 허위였다고 깨닫는 순간 그녀가 맞게 될 죽음, 그녀는 정말 ‘이해해 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일까. 어쩌면 숙명이라고 착각하고 실재도 없는 대상을 향해 과도한 열정을 불태웠던 것은 아닐까. 사실은 행복했던 자신의 일상적 삶을 소모해가며. 그 열정이 아니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이 여기고 그 열정이 고상하고 우아한 정열이라고 착각해가며. 불행은 그녀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아연한다. 엘라가 낳은 네 번째 아이. 때늦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남편은 멀쩡한 제 자식을 트리위의 핏줄로 단정한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까.” “그러니까 그놈하고 하숙집에서 놀아났었군. 어디 보자 날짜가 8월 둘째 주고 태어난 것이 5월 세 번째 주니... 그래... 그랬었군. 저리 가라. 이 못된 놈아. 넌 나와 상관없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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