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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poésie

학야리에서

다시 학야리에서


1


하얀 졸음같던 형광등 아래
밤새 투닥이던 타자기 소리
충혈된 눈 자위 부비며 움켜넣던 새벽 2시 辛라면 가락.

내 나이 스물 여덟살.
한여름 소금기로 남은 건봉사 지나 냉천리의 유격장
혹한기 텐트 속에서 졸여 먹던 건빵의 기억.

지겹게도 무덥고 모질게도 시리던 15년 전 학야리.

잊고 살다가도, 까맣게 잊었는가 하다가도
사단기동훈련 일주일 내내 벗지 못해 생긴 군화속 무좀이 다시 살아나고
겨울 길목에선
영화 20도 탄약고 새벽근무 귓볼 동상으로
오늘도 가렵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햑야리.



2

아내는 울고 있었나.
결혼하고 딸랑 90일 만에 훌쩍 입대해버린 남편을 찾아
부산에서 속초까지 밤을 세워 달려와선
그 짧은 하룻밤, 낯선 여관을 뒤로 하고
속초발 시외버스에 오를 때면
어슴푸레 웃던 아내의 얼굴이 차창 밖에선 보이지 않았다.

군화 까치발로 차안을 기웃거리다
버스가 떠나 버리면
가슴속을 휘익 스쳐가는 바람,
온 몸이 비어 버려
후줄근하게 젖어 오던 낮술잔들...


3


안개들이 기억처럼 머물러 있는
2005. 7월 강원도 고성군.
밤새 선잠 뒤척이다
새벽녘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불현듯 나타나는 울산바위처럼
가슴에 못내 지우지 못한 기억.

한여름을 뒹굴던 신병교육장으로
25개월을 하루하루 지우며 살았던 학야리부대
아내와 거닐던 화진포 언저리를
혼자서 다시 되짚어 보면

그리워하면서도 우리는 오히려 사랑을 스쳐보내는 것은 아닐까.
늘 그리워하면서도
오늘도 그저 스쳐 가는 것은 아닐까.


회한처럼 안개들이 머물러 있는
2005. 7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학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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