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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Paradise

버닝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벤은 진지함을 버리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냉혈한이었을까, ‘태워주기를 기다린’다고 짐짓 단정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대상을 태우면서 가슴에 베이스를 느끼는 자라면. 그러고도 대상은 ‘사라졌어요, 연기처럼’이라고 읊조리는 벤은 적어도 내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내가 아는 한에는 벤처럼 쿨하게 삶을 즐기기만 하는 삶은 이제껏 없었으니. 벤이 보여주는 라이프 스타일은 흔히 현대인이 꿈꾸는 환각 같은 것일지도. 벤 역시 또 다른 비닐하우스(연주였던가?) 태우기 위해서는 욕실에서 콘택트렌즈를 껴야 하지 않았던가.
해미가 태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종수에게 ‘창녀’와 같다고 비난을 받을 만큼, 자신을 둘러 싼 옷 같은 것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춤추고 싶었던 그녀. 그래서 ‘죽음의 고통’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그녀. ‘처음엔 주황색이었다가 피처럼 붉은 색이었다가 그리고 보라색, 파란색’이 되는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소망은 이루어진 걸까, 카드빚에 쫓겨 매장 앞에서 몸을 흔들어야 하던 일상의 족쇄를 벗고. 환상적으로 족쇄를 태우는 그런 버닝 또한 비현실적이다. 그녀 역시 종수와 섹스를 나누기 전 거추장스럽게도 꼼꼼하게 콘돔을 씌워야 했으니.
문예창작과를 나온 재능을 아버지 재판의 탄원서 작성에나 써 먹을 수 있었던, 못난 자존심은 버릴 수 없어 군대 조교처럼 꽥꽥대는 대형마트 직원 앞에서 발끈하고 돌아서던, 그녀의 빈 방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남루한 욕망을 채워야 했던, 그러면서도 짐짓 진지하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던, 그래서 사라진 그녀의 흔적-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우물같은-을 좇아 집착하던, “남자들 앞에서 옷을 왜 그렇게 잘 벗어? 창녀들이나 그렇게 벗는거야“라고 결국은 비루한 편견을 드러내고야 마는 종수는 자화상 같은 존재다. 단 한 가지, 그의 비닐하우스 중 하나, 벤의 복부에 칼을 꽂고 자신의 속옷까지 다 밀어 넣은 포르쉐를 태우고 알몸으로 차를 몰던 용기만 제외하고. 그러나 종수 역시 다 태울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옷가지마저 태워 버렸던, 그럼에도 나타나서 카톡을 보며 킬킬거리고 돈을 요구하는 어머니, 감옥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살아야 하는 아버지라는 비닐하우스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미련해서 태우지 못하고, 비겁해서 태우지 못하는 나는, 태울 수 있는 것들, 태워야만 하는 비닐하우스 앞에서 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오늘도 가슴 한 구석이 스산하다. 그들의 비닐하우스를 그들의 방식으로 태운 세 인물을 보며,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버닝'(2018년, 이 창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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