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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았을까? 아직도 남았을까 몽매의 불꽃은 가실 줄 몰라 처음에는 심장에서 불길을 지피더니 오장육부 깡그리 태워 없애고 육신의 가죽마저 재로 만들고도 오히려 그을려 바래진 갈비뼈 가닥 위에 덩그렇게 매달린 정념의 고리. 더보기
열리는걸까요? 황폐한 곳으로 스며드시는군요, 당신께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만치 이해타산의 垓字를 파고 옹졸과 아집의 성벽을 세워 남루한 자존심의 깃발을 내어 건 음습하고 어두운 그 안으로. 눈부신 손바닥을 찰랑대며 당신의 초록세례를 내려주신다면 이 아둔한 가슴, 정말 열리기는 열리는걸까요? 더보기
이런 사진을 찍고 싶다 II "崔興孝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제일 잘쓰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응시할 적에 시험 답안지를 쓰다가 글씨 한 자가 왕희지의 글씨체와 꼭 닮게 써졌다. 그래 서 종일토록 들여다 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 글씨 한 자를 버릴 수가 없어 시 험 답안지를 가슴에 품고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 하다. 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그가 있는 곳을 모르다가 사흘 만에야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쳤더니, 울면 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려냈다. 이쯤 되면 '그림에 빠져서 영욕 따위는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 하다. 鶴山守는 온 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산속에 들어 가 노래를 익혔다. 노래 한 곡.. 더보기
뜻없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기약조차 못할 말도 많았습니다. 화사한 얼굴빛으로 다듬고선 상대에게 다가가 걸었던 말들, 이루지 못할 줄을 염려하면서도 용납되지 못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욕심을 앞세운 말들도 많았습니다. 명분없이 남을 할퀴던 말들, 실속없이 시간을 축내던 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정작 해야했던 말들은 고스란히 먼지처럼 쌓였습니다. 소중했던 사람들이 듣고팠던 말들도 결국은 남고 말았습니다. 뜻을 만들고 일을 이루고 선을 짓는 말들도 마음속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서로의 입들을 쇠창살에 꿰고서야 무거웠던 말들이 허공으로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햇살속으로 사라지는 사연들을 바라보는 퀭한 눈알들도 말라갑니다. 더보기
門 II 고집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억지스런 합리화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가소로운 자존심을 앞세워서 먼저 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상대가 자신의 문을 열거나 나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또아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방법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고리를 따고 열어야 하는지 어떡해야 내가 먼저 열어도 쑥스럽지 않을런지 마침내 열고 나면 또 어째야 하는지 망설이고 더듬거리다 시간이 갔습니다. 아니 정말은 무서웠습니다. 열고나면 보여야할 부끄러운 속살들이, 속으로 고여 있는 역겨운 냄새들이, 아니 문을 열고 당신을 맞아서 당신의 부피만큼 나를 비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만 흘렀습니다. 문고리도 부숴지고, 칠도 벗겨졌습니다. 애써 열지 않아도 여기저기 삭아내린 부분들때문에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삐걱거리며 .. 더보기
門의 본질은 ‘닫힘’이다. 누군가의 闖入을 막아주고 窺視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문의 본래 소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의 역할이라면 담을 쌓고 또 문을 낸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고 보면 문의 또 다른 본질은 ‘열림’이다. 그러나 그 열림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어서 때로는 까다로울 수도, 어떨 때는 까닭도 없이 한없이 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風磨雨洗로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 앞에서 문고리를 열어주던 이의 손길, 문지도리로 열치고 들어서던 이의 땀내음, 문지방을 넘어서던 신발들에서 떨어져 내린 흙들과 그들의 옷자락이 스쳤을 흔적들. 그 앞에서 당당하고 또는 가슴 떨렸을, 아니라면 조바심치고 비참하게 돌아서고 말았던, 이제 문은 남았으나 그들은 사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 더보기
나도 이런 사진을 찍고 싶다. 옛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없기로 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氷玉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가 없으므로 梅花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폭의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한 바람이 湘江의 넋*을 실어 오는 듯 했다. 갈대를 그리면가을이 오고, 돌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神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종이 위에 그린 풀잎에서 어떻게 향기를 맡으며, 먹으로 그린 들에서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것이 心眼이다. 文心과 文情이 통하기 때문이다. -중략 - 문인들이 흔히 대단할 것도 없는 신변잡사를 즐겨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의 편모와 생.. 더보기
Waiting for Gisselle Toeshoes가 없는 아이는 발레가 꿈이라고 했다. 한여름 뙤약볕 너머 골목길, 뒤축을 잘라낸 젤리슈즈에 리본 대신 혀 낼름 하곤 끈을 감는다. 더보기